
출판을 위한 애정의 유연성
독자가, 독자에게.
서점에 책이 없다.
서점에 책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건 헤비 마니아, 문장애호가들로부터 나오고 있는 말이다.
출판계는 이미 공급이 수요를 훨씬 초과한 상태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종이책이 수 백권씩 나와 있는 세상이고, 전자책은 AI 덕에 밑 빠진 독이 정말 밑이 빠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마니아들은 주저없이 말한다.
“서점에 읽을 책이 없다.”
살아남으려는 슬픈 몸짓, 문장을 바꾸다.
독자 실종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메이저 출판사들의 연간 단행본 총 매출이 메이저 OTT 플랫폼 단독 매출과 대등한 수준이다. 게다가 대중들이 책에 소비하는 시간은 0에 가깝게 수렴하는 중인데, 모바일 이용 소비시간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결정적으로 이건 국내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 추세다.
그런 상황에서 산업 자체가 당장 부도가 난 것은 아니니 일단 굴러간다. 전체 시장 파이가 날이 갈수록 줄어드니 출판사와 에디터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보다 많이 읽힐’ 수 있는 방향으로 급격히 쏠리게 된다.
그러니 이건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슬픈 몸짓이다.
몰라서 책을 그렇게 편집하는 게 아니라, 알기 때문에 스트레이트로 바로 내다 꽂아버리는 형태로 책을 만들어야만 한다.
마니아 독자들이 열광하는 건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통찰, 그로 인해 빼곡하게 우거진 문장의 숲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책은 시장에서 쉽게 팔리지 않는다. 아니, 마니아들이 사서 읽어줄 게 아냐?
미안하지만, 마니아들은 그런 책이 세상에 나와도 존재를 모른다. 메이저 출판사의 간택을 받지 않는 이상에는, 자본의 화력을 등에 입지 않는 이상에는, 대단한 문학상이라도 타지 않는 이상에는,
유통조차 제대로 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왜냐면, 마니아들이 시장을 지탱해주는 형태인 것도 맞지만, 마니아는 문자 그대로 마니아다. 오히려 전체 분야를 탐독하거나 열린 마음으로 글을 대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매우 보수적이라, ‘검증된’ 작가나 출판사, 이미 바이럴이 터진 책이 아니면 쳐다도 보지 않는다.
그러니 소위 ‘팔리는’ 책이란 건 시장에서 바로 호응이 와주는 책이다.
정보성이 강하거나 자본적 기대감이 강하거나 작가가 셀럽이어야 한다.
팔리는 책의 요소로 전체를 꾸미다
그런 책들은 목적에 부합하기만 하면 된다.
빼곡하게 우거진 문장의 숲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정보 획득 과정에서 즉답을 원하는 이들, 자본 형성 기회에 편승하려는 이들, 그들이 독자로 참여하겠다는 건 산업군 종사자에겐 절대적 기회다.
그러니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서글픈 몸짓은 이때부터 빛을 발하게 된다.
그들에게 ‘내가 책을 한 권 읽었다’는 성취감부터 제공하기 위해 행간을 널찍하게 벌려두고 종이는 평량 100g 이상을 써서 무게감을 준다.
그리고 책을 읽으라는 건지 디자인을 눈으로 담으라는 건지 소장욕구에 불을 지핀다는 이유로 원고 편집 에디터보다 표지와 내지 디자이너에게 더 많은 돈을 쓴다.
그렇게 문장은 할랑하지만, 매우 그럴싸한 상품이 세상으로 나오고 바로 소비된다.
이런 책들 사이에서 마니아들이 탐하려는 책은 낄 자리가 없다. 처음부터 그런 책들은 정해진 소수의 메이저 출판사에게만 생산, 판매의 기회가 갈 수밖에 없다.
문화의 하향편중화
마니아와 대중. 결국은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대중이 승자란 소리다.
마니아들은 마니아들만의 놀이터에 남을 수밖에 없다.
이미 모바일 웹에서 소비되는 글들은 모두 스크롤 리딩 타입이다. 순식간에 휙휙휙 지나쳐가며 읽는 글들.
때문에 최대한 오독을 만들지 않기 위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단과 단을 고민없이 쉽게 띄우고 정제된 표현을 쓰기보단 날것의 표현을 쓰며 은유와 비유, 상징으로 말하기 보단 일단 내려꽂아버리는 스타일로 쓰게 된다.
대중은 그런 문화를 습득하고, 향유하며 소비자가 되고, 또 창작자가 된다.
당연히 그들의 글은 스크롤 리딩 타입의 형태다.
결국 필요한 건 시장의 저변확대와 마니아들의 유연성
이 문제를 타파하기란 실로 어렵다.
좋은 책은 결국 모두가 알아본다는 말은 맞을 수도 있지만 완벽히 틀린 말이기도 하다.
결국 알아본다는 그 시기가 창작자의 사후라면, 그것도 한 세기 뒤라면, 맞는 말이긴 해도 창작자한테 당장 후드려 맞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공급이 수요를 압도할 정도로 폭격되는 세상에서 과연 누가 괜찮은 책을 선별하여 자발적으로 소문을 내줄 것인가? 어쩔 수 없이, 퀄리티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유통조차 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책이 훨씬 많다. 이게 현실이다.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결국 대중보다는 소수의 마니아들이 바뀌는 게 더 쉽다. 마니아에겐 대중에게는 없는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니아들이 스스로 창작하여 마니아들끼리 나누거나, 마니아들이 적극적으로 좋은 책을 세상에 알려 대중의 눈을 바꿀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건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유연성이다.
검증되지 않은 신인의 글, 작은 출판사에게도 기회를 주겠다는 애정의 유연성.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저변확대는 따라오게 된다.
음, 길게 헛소리를 한 것 같다. 사실은 이 한 문장으로 다 정리될 말들이다.
독자들이여, 독자들을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