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트슨은 탐정이 아니다

와트슨은 탐정이 아니다

실험적 글쓰기와 독자, 그리고 비평의 부재에 대하여

2026. 1. 21.#홈즈#와트슨#실험소설#독자#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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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적 글쓰기

수림 스튜디오의 주인장 문수림은 스스로 실험적인 글쓰기를 추구한다.

다만, 이 정도 수준을 과연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느냐에서는 여러 사람들과 이견이 갈릴 수 있겠다.

그만큼 문예장르에서 ‘실험’이라는 말은 다소 무겁기 때문이다.

실험이라는 이름의 파괴적인 형식들

예전부터 작가들은 저마다 실험적인 글을 써왔다.

제임스 조이스는 언어를 서사에서 해방시켰다. 문장 구조를 붕괴시켰고, 의식의 흐름을 극단화했다.

사무엘 베케트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서사를 제거하는 실험을 했다. 사건, 인물, 목적의 단계적 삭제를 통해 화자의 존재마저 불확실하게 만든다.

훌리오 코르타사르는 챕터를 점프하며 읽는 구조로 만들고서는 순서 따윈 독자가 알아서들 읽으라고 만들었다.

조르주 페렉은 프랑스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e’없이 프랑스어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음, 다들 정상은 아니다.

실험적 글쓰기의 의의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인 실험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걸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의 영역 확대에 이바지했다는 거다. 그것도 영구적으로.

무슨 말이냐 하면, 기본적으로 소설은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재미난 메시지’라는 게 통념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게 사회적으로, 대중적으로 통념이다. 헌데, 위의 사례들은 그게 정말 소설의 전부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 행위들이다.

덕분에 소설은 독자에게 건네는 ‘재미난 메시지’로만 그치지 않고, 그 형식과 조건 자체를 실험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소설은 ‘이야기’와 ‘서사’를 전달하는 매체를 넘어 그 자체를 다채롭게 설계할 수 있는 장르로 정착하게 된다.

천재들은 모두 실험을 추구한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험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이 넘쳐나고 있다.

웹소설 같은 대중문학 장르가 팽배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지적 유희의 만족과 타고난 천성의 고집, 대쪽 같은 성품으로 모두에게 천재로 각인되고 싶다는 욕망의 젊은 작가들이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문수림의 실험은 실험이라고 부르기엔 한없이 가볍게 보이리라.

분명, 어떤 뚜렷한 제약, 그것도 감히 도달하기조차 버거울 정도의 선을 긋고 글을 쓴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도전이다. 경계까지 치열하게 밀어붙여 문장을 쌓는 건 분명 누가 시도했다고 한들, 그건 그에게 유의미한 도전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 실험을 알아봐 주는 독자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혹은 애초에 그런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실험이라면, 이런 노력들은 과연 무엇을 향하고 있는 걸까?

홈즈와 와트슨

실험적인 작품들은 기본값이 친절함에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창작자의 메시지가 우선이다. 그러니 일반 대중에겐 원치 않는 초대로부터 시작되는 길고 지리한 두뇌 싸움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홈즈와 와트슨을 호출해보자.

일반 대중은 와트슨의 위치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설에서는 늘 셜록에게 의지하는 와트슨을 보였지만, 사실 와트슨은 대단한 사람이다. 이야기를 직접 서술하는 위치이며, 셜록이 보여주는 추리술을 정리하고 담을 줄 아는 인물이다.

그러니 와트슨은 홈즈보다 한발 늦은 추리 속도 외에는 나무랄 게 없는 유능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바로 일반 대중, 즉 독자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홈즈는 누구일까?

우선 작가는 절대 아님을 명확하게 말해두겠다. 홈즈나 와트슨이나 이미 일어난 사건, 즉, 이미 빚어진 작가의 소설로 걸어 들어온 존재들이니까.

그래서 내가 본 홈즈는 ‘프로 문예비평가’다. 와트슨보다 훨씬 앞서 각종 이론서적과 다양한 고전을 두루 섭렵하여 추리술이 조금 더 발달한 존재들.

그리고 문단 밖, 아마추어 신인의 실험소설이 주목받기 힘든 점이 여기에 있다.

프로비평가들, 홈즈는 제도 밖의 신작에 큰 관심이 없다. 아, 오해는 말아 달라. 그건 그들이 오만하거나, 권위적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그게 그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한계

그렇다, 소위 권위 있는 문예비평가들은 문단 밖, 창작자들의 글은 읽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비평가들이 옹졸하다거나 지나치게 권위적인 꼰대여서가 아니다. 그들은 직업인이다.

일단 미검증 신인들이 아니더라도 매달 읽어달라고 들어오는 청탁물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글이 불러올 결과를 알고 있는 이들이다. 검증되지 않은 신인에게 평가를 한다는 것. 신인의 글을 인용한다는 것. 그건 문자 그대로 신예발굴이 되는 격이니 남발해서는 곤란하다. 그들도 확실하다 싶을 때만 나서야 되는 거다.

이제 작가는 와트슨의 활약만으로 주목받아야만 한다

그러니 창작자들 입장에서는 고민해볼 문제다. 실험의 레벨을 처음부터 과도하게 올려서 시작한다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에 대한 고민 말이다.

홈즈가 부재한 시스템적인 상황에서 작가가 기댈 곳은 와트슨뿐이다.

와트슨도 매우 유능하지만, 와트슨의 직업은 탐정이 아니다. 그는 퇴직 군인, 전문직 의사이며, 홈즈의 메이트일 뿐이다.

직업적으로 읽을 의무가 없는 와트슨들에게는 결국 개인적인 취향과 흥미가 먼저 작동한다. 이건 결코 막을 수 없다.

그러니 애써 고르고 골라야 한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자신의 예술작품을 공들여서 읽어줄 독자를 어렵게, 어렵게, 구하러 다녀야 한다.

천재증명을 꿈꾸고 도전하는 건 자유지만, 당연히 외로움과 굉장히 오랜 시간 동거해야 하는 것도 필연이란 말이다.

실험의 적정선

그래서 문수림의 고민과 도전은 본격적이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진 어정쩡함이다.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지만, 분명히 계산된 전략이다.

실험을 하더라도 대중들이 충분히 쉽게 걸어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우선은 최대한 문턱을 낮춰보는 거다.

그러니 요즘 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은 그런 노력의 일부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이런 노력들은 결과적으로 문단에서도 충분히 참고해볼 만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있을 무수히 많은 실험 중 일부는 제도권의 프로 소설가들 입장에서도 차용해볼 수 있는 요소들이 분명 있을 것이란 소리다.

당장 이 공간을 빌어 여러분이 볼 수 있는 실험은 <500자 소설>과 <겨울이었다> 프로젝트, 그리고 엉성한 웹앱 정도이지만, 앞으로 수림지를 통해 끊임없이 발표될 프로젝트와 실험들은 모두에게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 바라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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