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자 소설 샘플

500자 소설 샘플

문수림이 직접 집필한 5편의 샘플

500자라는 제약은 문장을 더 선명하게 만들고, 이야기의 본질만을 남깁니다.
아래의 5편은 문수림이 매일 쓰듯 쌓아온 이야기들 중 일부이며,『500자 소설』 챌린지 앱의 기준이 되는 작품들입니다.

2.



“네가 헤밍웨이도 아니고, 그런 게 소설이 되겠냐?”

고지대에 홀로 놓인 낡은 산장은 해를 잃었다. 흐릿한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비춘다. 카페인에 겨우 몸을 기댄 두 사람은 발밑으로 천천히 차오르는 검은 물을 보고도 애써 모른 척 했다.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드는 거니까. 오히려 더 좋지 않을까?” “아니, 요즘 독자들은 확실한 결말을 원해.” “몰라, 어쨌든 500자면 충분해. 그 안에 전부 담을 수 있어. 하기야, 이젠 닿을 독자도 없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명이 꺼졌다. 모든 신경이 어둠 속에 잠겼다. 어느새 허리까지 차오른 물. 죽음이 가슴을 향해 찰랑거렸지만, 더는 올라설 곳도 없었다.

“젠장, 이제 정말 끝이군.” “누가 떠올라?” “말해 뭐하겠어! 당연히…” “어때? 이런 거야. 지금 우린 전화 한 통은커녕 메시지 한 줄조차 남길 수 없어.”

그렇게, 인류의 마지막 대화가 물에 잠기고 말았다.

5.



노부부의 손이 허공에 맞닿아있다. 두 사람의 지난 시간이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주름에 파묻힌 자잘한 상처들과 거칠어진 두 손이 대신 말해준다.

남편은 아내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댄다.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 사이로 조합되지 않은 단어들이 올라서려 하지만, 쉽지 않다. 마지막 말들이 입구멍 안으로 자꾸만 되들어간다.

ㅊ, 처, 어, 처엇.
아이들의 이름마저 잊어버린 노모는 배 아파 낳았던 순서대로 애들을 떠올리지만, 죽음은 냉정하다.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지난 세월에 눈물샘마저 다 마른 탓에 노인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격해진 감정에 턱만 벌어지고, 마른 눈만 붉어졌을 뿐.

그는 이후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아내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둘은 반세기가량을 한 이불 속에 살아 죽음에, 죽음으로 답할 만큼 애틋했지만, 삼켜진 말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만이 가능할 뿐, 알 수는 없었다.

여편네, 설마 애들 이름을 잊었을라고. 그렇게 의심조차 않았다.

45.



애써 달려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높다랗게 쌓아 올려진 방벽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마누엘에게 나귀 위에 올라탄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배가 어찌나 나왔는지, 나귀가 걸음을 뗄 때마다 당장이라도 엎어질 것 같았다.

“국경을 넘으려고? 왜? 관리라도 죽였어?”

마누엘의 모든 신경이 순식간에 허리춤 뒤에 숨겨둔 단도로 향했다.

“요점만 말하지. 가진 걸 다 털어 내게 주면 넘는 방법을 알려주마.”

국경을 넘을 수 있단 말에 마누엘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봤다.

“일 없소.” “혼자서는 무리일 텐데?” “그렇다고 남에게 미래를 넘길 수야 없는 법이죠. 어머니가 그랬어요. 내가 급할 때,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이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순간 남자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지나 싶더니 구겨진 뱃살 밑에서 날이 시퍼런 손도끼가 나타났다. 때를 맞추어 마누엘의 단도도 마중을 나왔다. 둘의 칼날이 찰나를 찢었다.

74.



결국 알리햐는 홀로 남아 몇 번의 생을 다시 더 살아야 했다.

잔혹한 형벌이었다. 몇 번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 불같이 사랑해야 했고, 제 살점 같은 아이들을 낳을 때마다 세상의 벼랑 끝 앞에서 고작 까치발로 버텨내야 하는 고통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래도 그런 만남만 있다면 매번 썩 괜찮은 인생으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늘 그들을 먼저 땅에 묻어야 했다. 남편과 아이들의 관을 덮고 누르는 비석이 그녀의 심장에 말뚝처럼 박혔지만, 신은 그녀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은 잔혹했다. 그녀에게 쉼 없이 시련을 내렸고, 그때마다 고작 숨만 쉴 수 있는 작은 틈 하나씩만을 내주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 절대적 망각이 주어졌다는 정도다. 그녀는 매번 인생을 새롭게 살았다.

“어때? 이번 소설 괜찮지 않아? 알리햐는 내가 정말 애정하는 캐릭터야.”

96.



얼지 않는 하늘.
12월이지만, 이스탄불의 하늘은 습기만 고요히 떠있어 계절감이 흐릿하다.

토를가는 비쩍 마른 몸이 되어 우울만 조금씩 불려가고 있다. 몇 년째 미완의 장편소설을 쓰고 있는 탓이다. 딱히 독자가 없음에도 그는 늘 꼬박꼬박 써내려간다.

반면, 이즈미르에 살고 있는 친구 율루는 아랫배가 튀어나왔다. 이미 몇 년 전에 소설집 하나를 출간한 이후로 어렵게 집필에 몰입하기보단 다양한 활동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중이다.

둘은 자주 통화했고, 그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만 했다.

"너도 일단 완결부터 내야지. 그래야 다른 이야기들 중 하나가 터져서 생활이 될 거 아냐?" "돈을 셈하는 순간, 상상력이나 인식이 모두 그쪽으로 매몰 될 수가 있어. 그러면 다양한 글을 쓰기 어렵지 않을까?"

서로를 자극할 만한 말들이었지만, 누구 하나 조금도 타격을 받진 않았다. 둘은 서로를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둘을 아는 이들은 모두 작가라 불렀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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