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 탱고를 읽고 급히 남기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 탱고를 읽고 급히 남기다

초현실이란 장치로 서사를 깁다

2026. 1. 26.#사탄탱고#크러스너호르커이#문학상#이리미아시#운동성#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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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들은 책을 고르기 전에 저자나 작가의 타이틀을 먼저 확인하려고 하다. 어떤 대단한 문학상을 받았거나, 굉장한 실적을 낸 사람의 저서만을 고집한다는 말이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시대, 책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 그런 시대에 살다보니 책을 고르는 기준으로 이런 나름의 잣대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로 인해서 신인들은 더더욱 벽을 넘기 힘들어졌지만...

뭐, 어쨌든 이쯤에서 각설하고.

나도 이번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었으니 말이다.


2025년 세계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대하는 나의 태도

솔직히 난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포장하는 책들에는 반감이 있다. 정확히는 그 상술에 꽤 강한 반감이 있다. 매년 수상하는 작가와 작품들이야 하나 같이 멋진 사람들이지만, 그걸 포장하는 출판사는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그래서 내 돈과 시간을 녹여 책을 고를 땐 가급적 그런 책들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그런 책들은 이번처럼 모임에서 읽어보자는 이야기가 저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을 읽게 되는 날에는 모임의 단톡방 대화창도 잘 열어보지 않게 된다. 책도 받자마자 광고 띠지부터 찢어서 버린다.

서사물 그 자체로만 보기 위한 나만의 사전작업이다.

배경지식 없이 읽다.

당연히 일체 검색도 하지 않는다. 모든 건 다 읽고나서 해도 늦지 않다.

덕분에 작가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른 상태로 독서가 시작된다. 그러니 소설의 배경이 1980년대의 헝가리, 망해가는 공산주의 체제라는 것조차 몰랐다.

그저 차례대로 등장하는 인물,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할 뿐.

환상적인 시작과 단단한 문장

소설답게 시작은 환상적이다. 종이 울릴 수 없는 환경임에도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후터키.

그때부터 이어지는 문장들은 아름답다. 마지막 페이지 구두점까지. 다른 소설들처럼 괜히 반복되는 서술이나 잡다한 버릇이 없다. 모든 문장은 매끄러우면서 신선하다.

고의적으로 단을 나누지 않은 문장임에도 가독성이 떨어지기는커녕 한껏 몰입될 뿐이다.

책 좀 읽었다는 어떤 이가 인터넷에서 문단을 나누지 않아서 가독성이 떨어졌다나 뭐라나, 평을 썼다지만 그건 평소 전혀 소설을 즐기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렇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호의 차이다.

문예 소설은 어디까지나 텍스트 자체를 음미하는 이들만을 반긴다.

생각 없이 읽어도 스트레이트로 뇌리에 박아주는 요즘 책들, 특히 자기개발서형 문장에 푹 빠져있는 이들은 덮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그런 장르다.

큰 줄기 없이 이어지는 장면들

소설 『사탄 탱고』의 매력 중 하나는 인물들 개개인의 서사에 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에게 필요한 건 그들의 현재 상황, 처지일 뿐이다. 그들 각자의 사정이나 과거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낀다.

그것보단 한 마을에 모여 살고 있던 그들의 지금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욕망으로 선택하고 움직이는가만 보여준다. 이건 흡사 TV드라마나 영화와도 같다.

속도감 있게 꾸려진 영상물들이 그렇듯이, 작가는 현재 보이는 것에 집중해서 독자를 끌고 간다.

과거의 영광을 바라는 마을 사람들

정확히는 집단 농장이란 표현인데, 배경을 모른 채 읽었던 내 입장에서는 ‘마을 사람들’, ‘마을 공동체’처럼 읽혔다.

그들은 과거에 좀 잘 나갔다. 누군가는 기계장치를 잘 다뤘고, 누군가는 농사일을 곧잘 했고, 부인들도 부지런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지금이다. 마을은 생기를 잃고 몰락했고, 뾰족한 타개책이 없다.

그나마 돈이 돌고 있는 건 외부에서 품을 팔아서 벌어오는 돈인데, 소설의 도입에서 그 돈을 들고튀려던 이들이 나와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모습부터 보여준다.

스스로 힘을 내서 돈을 굴리는 건 매춘을 하는 어린 소녀들과 술을 팔아서 가게를 꾸리고 있는 선술집 사장뿐이다.

그렇다, 그들은 답이 없는 사람들이다.

거미줄에 묶인 사람들

소설에는 크게 두 가지 이미지와 그 외 이미지로 구분되어 있다.

중심에 있는 두 가지는 단순하다. 하나는 악마로 대변이 되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욕망, 다른 하나는 그런 욕망만 품은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 바로 거미줄에 묶인 거미의 먹이처럼 굳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둘은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이미지다. 그 외에도 이미지들이 있지만, 앞서 언급한 둘만큼 고정적이거나 중요하지는 않다. 끊임없이 내리는 장대비와 종교적 언급,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사건들도 있다지만, 이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주는 풍미, 그러니까 부가적인 부분이지, 메인은 아니다.

초현실적인 사건들이 주는 당혹스러움, 또는 유머

초현실적인 사건들은 분명 당혹스러움을 줄 수도 있다.

앞서 말했지만, 작가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장면만을 보여준다. 그 말은 여기에 어떤 해석이나 그에 따른 결말을 별도로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아주 현실적인 진행 중에 갑자기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사건. 거기에서 길을 잃은 독자들이 많지만, 이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소설이란 게 원래 환상이고, 뻥이다. 그리고 작가란 존재는 그런 환상을 필요에 따라 조율하는 작자다.

의도적으로 과하게 뻥을 친 부분은 분명 의도가 있어서다. 그렇지만, 그걸 독자가 굳이 다 해석해낼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문제는 우선 잠시 미뤄둔 채 마지막까지 소설을 읽으면 저절로 풀리기 때문이다.

비현실을 장치로 쓴 원형적 구조

소설은 종소리로 시작해 종소리로 끝난다. 중간에 유령인지 귀신인지, 시체인지도 모를 게 나타나지만, 그 영문 모를 존재가 등장인물들을 어찌하지는 않는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러니 그런 초현실적인 사건들조차 “등장인물들의 선택이나 욕망의 질주”를 막아서지 못한다는 거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그저 하나다. 지금의 욕망을 해소하는 거다. 지금의 욕망은 몰락하는 마을을 벗어나는 게 일번이고, 다시 잘 먹고, 잘 사는 게 이번이다. 이 과정에서 멋진 몸매의 슈미트 부인과 뒹굴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것이고, 안되면, 안되는 대로, 부족한 대로 다른 여자를 취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다른 남성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정작 욕망의 대상인 슈미트 부인은 전혀 다른 남자에게 연애 감정을 품는다.

정말이지 인간답지 않은가? 인물들 누구 하나 비전형적이지가 않다.

이런 인물들이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결국 마을을 벗어나 곳곳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여주지만, 작가는 그들의 최종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정말 그들이 이리미아시의 야욕대로 테러리스트가 되었는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마을에서 또 한 차례 나자빠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배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찾아온 이들은 대략 짐작만 할 뿐이다.

아, 그 시절의 공산국가들이 다 나락을 갔으니, 그들도 다 말아먹었겠지- 하고.

그렇지만 소설은 여기서 바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그 길로 방향을 틀어서 한 동안 독자가 잊고 있었던 인물을 소환한다.

바로 의사다.

시대의 식자층으로 대변이 되는 의사는 현재의 마을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 하나 나서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은 인물이다. 오히려 술에 절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인물. 소설은 그런 그가 소설을 쓰는 것으로 이야기가 닫히게 된다.

그 이야기의 도입은 후터키가 울리지 않는 종의 종소리를 들으면서부터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시작된 이야기였지만, 누구도 멈출 수 없었던 이야기. 그럼에도 누구 하나 벗어나질 못했던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되면서 또 닫히고 만다.

종교도 구원이 되지 못한 시대

작품에서 헐리치 부인으로 대변이 되는 종교인이 있지만, 헐리치 부인 역시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녀는 구원받지 못한 채 이야기 속에 갇혀 있다. 그녀가 혐오하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혹자들은 그 이유를 거짓 메시아의 포지션을 차지한 이리미아시 때문이라고 한다. 거짓된 메시아가 등장했다는 것부터 강력한 악마, 즉 사탄이 등장한 것이니 어정쩡한 신앙으로 어찌될 수 있겠냐는 거다.

실제로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찾아본 자료들에는 이리미아시라는 인물을 가짜 메시아로 규정하는 분석형 글이 적지 않았는데...

글쎄, 난 좀 다르게 읽혔다.

외부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마을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 찾아온 이리미아시나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마을 사람들이나 내 눈에는 똑같은 처지였다.

그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들이란 말이다.

분명 이리미아시가 마을 사람들의 몇 푼 남지 않은 돈도 털어 먹었지만, 정작 중요한 지점은 이리미아시가 그 돈 자체를 탐낸 게 결코 아니라는 거다. 이리미아시가 필요했던 건 처음부터 사람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

그와 마을 사람들의 차이점은 오직 하나다. 운동성의 유무다. 마을 사람들이 환경에 패배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이들이라면, 이리미아시는 마지막까지 저항은 해보겠다는 의지, 운동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그 운동적 성향이 대사기극처럼 보이게 되는 건 다른 한쪽이 운동성이 전혀 없어서다. 애초에 뜻이 맞지 않다며 술집 사장과 이리미아시가 길을 함께 하지 않는 대목을 집중해 보자.

술집 사장은 자신의 자본을 지키며 더 불려나가겠단 명확한 운동 방향성이 있다. 반면,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다. 환경에 무너진 사람들이고, 거미줄이 생기는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는 사람들이다. 끊임없이 거미줄을 치워가며 손님을 응대하는 술집 사장과는 구분되는 이들이다.

실패한 체제, 엇나간 운동성

이쯤에서 배경이 몰락해가던 공산국가 헝가리가 배경이었단 걸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당시 사회주의 이념 자체가 자본주의 이념과는 다른 방향성과 운동성을 가지고 시작되었단 걸 잊지 말자.

그러니 이리미아시의 운동성은 마지막 저항이란 점에서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실패한 체제에서 실패한 방식을 이용한 저항은 그 끝이 부질없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리미아시는 마지막까지 같은 얼굴이지를 못한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에게도 두려움이 생기고, 조급함이 생긴다.

스스로 욕망에 빠진 이들을 구슬려 쉽게 그들을 주머니에 채워 넣었지만, 주머니 자체가 이미 낡은 것이라면 언제 구멍이 뚫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탄은 누가 아닌, 그들

바보같이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사기로 이끈 자만 사탄은 아니다.

모두가 사탄이다. 그날, 그 자리에서,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한 채 술만 마시던 의사도, 마을의 장애아를 소외시켰던 마을 사람들도, 자신의 부만 챙기려고 술집을 포기하지 않은 술집 사장도, 다 체념하고 마을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모두 사탄이다.

하나같이 모두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선택을 했을 뿐이다. 다만, 누구도 그 끝이 아름다울 수 없었던 건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던 더 거대한 환경, 국가라는 시스템의 문제다.


간만에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라서 가볍게 글을 남겨봤다.

날림이라고는 해도, 이렇게라도 적지 않으면 그냥 또 다 잊어버릴 것 같아서...

헌데,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라 남겨본다.

정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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